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리 강화 회의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youtube(Dbg0KcIad9c)]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끝난 뒤 전후 국제 질서 및 전쟁 관련 각종 사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[[협상국]]과 패전국인 [[동맹국]] 사이에 이루어진 국제 회의. 1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국제 질서를 협의하기 위하여 이루어졌으나, [[세계평화]]라는 거창한 표의와는 달리 실상은 수많은 이권 다툼만 있었으며, 사실상 협상국이 세계를 자기 입맛대로 바꾼 회의였다. 열강을 제외한 [[식민지]]와 소국의 권리는 무시되었고, 강화 회의의 주도자들이었던 [[빅4#s-3|주요 4개국]]과 지도자들간 갈등은 타협의 끝에 "화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징벌적이었고,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관대한"[* "Too punitive for conciliation, too lenient to keep Germany from recovering." [[헨리 키신저]]의 평이다.] [[베르사유 조약]]이라는 모호한 결과물과 동유럽의 혼란, 그리고 [[제2차 세계 대전|새로운 전쟁]]을 불러왔다. [[인종차별]] 문제, [[팔레스타인]] 문제, 조선, 베트남 등 식민지의 [[독립]] 문제 등이 죄다 무시 또는 악화되었으며, 회의에서 다루어진 영토와 민족의 구별은 오히려 [[다민족국가]]의 대량 추방 또는 [[단일민족국가]]의 [[소수민족]] [[학살]]로 이어졌다. 또한 열강의 이익만을 반영한 회의 결과에 분노한 식민지 국가의 [[민족주의]] 인사들은 열강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[[사회주의]]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. 바로 이 회의에서 [[영어]]가 [[프랑스어]]와 더불어 외교 국제어의 지위에 오르기 시작한다.[* 물론 불어를 제치고 중심이 되는 것은 [[제2차 세계 대전]] 이후에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